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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4대문명보다 1,000년 이상 앞선 한국문명
한국의 건국 역사를 부정, 말살한 일제 식민사관과 식민사관을 추종ㆍ계승해온 식민사학파 학자들의 영향으로 신시, 고조선, 북부여,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의 건국 역사를 배울 수도, 가르칠 수도 없었다. 7,000년전 전후에 환웅천왕이 건국한 신시의 역사와 4343년 전(서기전 2333년)에 1세 단군 왕검이 건국한 고조선의 역사는 물론, 2400여년 전에 해무수천왕이 건국한 북부여사, 2100여년 전에 동명제가 건국한 부여사, 추모성왕 주몽의 고구려 건국사, 박혁거세왕의 신라 건국사, 김수로왕의 가야 건국사 등조차 믿을 수 없다고 부정되어 왔기 때문이다.
아래의 단군 영정에서 보듯이 단군왕검을 한국사의 맨 윗자리에 올려놓는 애국ㆍ민족주의자들조차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 원시인 정도로 생각하여 왔다.
아래는 김종서 박사의 연구서인 『신시 단군조선사연구』『단군조선 영토연구』『기자 위만조선연구』『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비정 연구』『잃어버린 한국의 고유문화』『요하문명의 주인공은 누구인가』『국사교과서 바로잡기 100장면』 등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더 자세한 것은 이 연구서들을 참고 하십시오.
그러나 한국인의 조상들은 지금부터 6720년전(B.C.4710년) 전후에, 즉 세상 최초로 누에를 길러 그 실로 비단(명주)을 짜서 옷을 만들어 입는 비단문화를 일으켰다. 그 증거가 옥으로 만든 누에(옥잠)이다.
뿐만 아니라 1세 단군 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던 4343년전(서기전 2333년) 보다 약 4,000년 앞선 즉, 지금(서기2011년)으로부터 8210년 전 이전부터 한국인 조상들은 옥으로 귀걸이를 만들어 멋을 내는 귀걸이문화를 세상 처음으로 만들고 발전시킨 문화인들이었다.
남녀 구분 없이 애호하던 귀걸이문화는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는 물론 선조대왕이 남자의 귀걸이 착용을 금지시킨 조선 중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왔다.
발해 북쪽으로부터 요하유역에서 수없이 발굴되었고, 발굴되는 옥귀걸이 금귀걸이 등이 발해 북쪽으로부터 요하유역이 신시, 고조선의 영역이라는 중요한 증거 중의 하나이다.
한국인 조상들은 약 12,000년 이전부터 집을 지어 마을을 이루고, 토기를 만들어 생활하던 문화인들이었다. 특히 고대 한국인 조상들이 사용한 고유 토기는 빗살무늬토기이었다.
발해 북쪽으로부터 요하유역에서 다량으로 발굴되는 빗살무늬토기 스스로 이 지역이 신시, 고조선의 영역이라는 중요한 증거 중의 하나가 된다.
고대 한국인들은 지금으로부터 7910년전(B.C.4900) 이전부터 죽은 자를 위한 무덤으로 거대한 적석총을 쌓은 종족이었다. 부신사해문화(B.C.4900 전후)기와 홍산문화기(B.C.4710~B.C.2920)의 적석총 유적, 고구려 적석총유적, 백제의 적석총 유적 등이 요하유역과 압록강 유역, 한반도가 같은 문화권 이었음을 증언해주고 있다.
또한 7610년 전 이전부터 자신이 죽으면 천국으로 올라가 영생을 누리고, 자신들을 천국으로 데리고 갈 사자를 용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조상들이 천국에서 용을 타고 인간 세상에 내려왔음을 믿던 용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7610년 전에 20여미터 길이의 돌로 쌓은 용 유적이 부신사해 마을에 서 발굴된 것이고, 세계에서 가장 앞선 것으로 알려져 온 중국 하남성 승지현의 앙소문화(B.C.4500~B.C.2500)의 채색토기문화 보다 약 700년 이상 앞선 조보구문화(趙寶溝文化:B.C.5200~B.C.4470)의 채색토기에 용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이며, 수많은 시간을 들여 만든 많은 옥룡들이 홍산문화(B.C.4710~B.C.2920)기 무덤 속에서 발굴되는 것이다.
사진에서 보는 아름다운 용들은 옥으로 만든 것이다. 전기톱, 선반, 쇠 줄, 쇠 조각도, 사포 등의 현대 기계ㆍ기구들을 이용한 현대인들도 만들기 쉽지 않은 수준 높은 예술품들이다. 그러한 예술품들을 돌조각 등의 원시적인 공구로 만들었다.
작은 돌조각과 같은 원시적인 공구로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은 옥룡들을 만들기 위해서는 높은 예술적 감각과 기술은 물론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왜 많은 시간과 정성과 기술이 필요한 옥룡을 만들어 사자의 무덤에 함께 묻었을까?
그것은 용을 죽은 자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중요한 기능을 가진 동물, 사자(使者)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북부여 건국시조 해모수천왕이 5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천국에서 흘승골성에 강림하였다는 『삼국유사』「북부여」편의 기록, 고구려 건국시조 추모왕이 인간세상의 왕위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아신 하느님(하나님)께서 황용을 보내시어 추모성왕을 천국으로 데려오게 하셨고, 추모왕이 황룡의 머리를 밟고 천국으로 올라갔다는 “광개토호태왕비 비문”의 기록, 천국에서 박혁거세왕을 인간세상으로 데려온 용마(龍馬:그 동안 천마로 잘못 알려짐)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 박혁거세왕의 왕후 알영을 천국에서 신라 땅으로 데리고 온 계룡(鷄龍)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대 한국인들은 용을 천국과 인간세상을 연결해주는 동물, 사자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인 조상들은 길이 20여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성전을 짓고, 60여미터의 거대한 탑을 쌓고 인간의 모습을 한 신상을 모시고, 자손점지, 질병쾌유, 사랑과 결혼, 기우(비를 빔), 기청(비가 그치기를 빔), 풍년, 마을 부족 국가의 평안, 전쟁 승리, 마음의 평안, 무병장수, 천국의 영생 등의 소원을 비는 신앙생활을 하여왔다. 세상 최초의 신앙체계, 세상최초의 종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하유역에서 발굴된 많은 양의 옥룡, 옥저룡과 돌로 만든 용 유적, 채색토기의 용 문양 등과 천국과 인간세상을 이어주는 용에 관한 기록 등으로 볼 때, 요하유역이 고대 한국의 역사영역 이었음을 알 수 있다.
8210년전 이전에 이미 마을과 마을 간의 전쟁이 있었다. 부족한 식량을 약탈하기 위한 것이다. 마을과 마을 간의 전쟁이 있었다는 것은 120가구로 만들어진 마을을 둘러싼 해자(도랑) 유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마을을 침범하는 적이 해자에 빠졌을 때, 돌, 창, 활 등으로 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약 7,000년 전후가 되면, 적의 침략에 대응하는 공동의 안보를 위하여 마을과 마을, 부족과 부족이 연맹한 마을연맹국가, 부족연맹국가가 출현한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국가이자 세계최초의 국가인 신시(神市)이다. 평상시에는 각기 자신의 마을, 자신의 일터에서 생업에 종사하다가 적의 침입이 있을 때는 성안으로 들어와서 적을 방어한다. 그것이 홍산의 산성(홍산취락유적지)과 마을유적이고, 노호산석성유지이며, 대해석성이다.
5,000년 전에 청동기 문화가 출범하고, 약 4500여년 전 전후에 오면 고도로 발달한 청동무기, 청동제기 등이 출현한다. 석기를 사용하던 이들에게 청동기는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청동기를 선점한 부족은 다른 부족을 정벌하였을 것이고, 다투어 청동기 제작기술을 받아들였을 것이며, 약육강식의 혼란은 신시(神市)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게 하였을 것이다. 그 것이 1세 단군 왕검에 의하여 건국된 조선이다.
1세 단군 왕검이 건국한 조선(고조선)은 란하 하류 유역에 있던 고죽국(孤竹國), 북경지역에 있던 언국(匽國) 등의 수많은 나라와 부족, 씨족을 제후로 거느렸고, 멀리 산동성에 있던 기국(㠱國), 하남성에 있던 채국(蔡國) 등으로 부터도 아래와 같은 청동기들을 선물(상납) 받던 국가였다. 이 은대ㆍ주초의 청동기들은 금속 귀했던 당대에는 대단한 가치를 가진 보물이었을 것이다.
위 내용은 김종서 박사의 연구서인 『기자 위만조선 연구』『부여 고구려 백제사 연구』『한사군의 실제위치 연구』『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비정 연구』『한국사 교과서 바로잡기 1000장면』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더 자세한 것은 역사모(www.yeoksamo.com) 홈페이지나 도서관ㆍ서점 혹은 천손(www.cheonson.net) 홈페이지를 찾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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